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센의 엘리자베트 (문단 편집) === 남편의 죽음 === 1905년 세르게이 대공이 [[사회혁명당(러시아)|사회혁명당]] 소속 혁명가 [[보리스 사빈코프]]에게 암살되었고, 엘리자베트는 산산조각이 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며 오열했다. 엘리자베트는 직접 감옥으로 찾아가 암살범의 구명을 청원했으나 상대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;" [[파일:Elisabeth Alexandra Luise Alix.jpg|width=100%]]}}}||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;" [[파일:Elisabeth Feodorovna.jpg|width=100%]]}}}|| ||<-2> 수녀가 된 엘리자베트 || 남편이 죽은 뒤 상복을 입고 채식을 하였으며, 보석이나 장신구 등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였다. (입양된) 아이들이 결혼하거나 독립하여 품을 떠나자[* 장녀(첫째)인 마리야는 1908년에 [[스웨덴]]의 [[빌헬름 왕자]] ([[구스타프 5세]]의 차남이자 [[구스타프 6세 아돌프]]의 동생)와 결혼하여 외아들(렌나르트, 1909~2004 : 귀천상혼했고, 두 번 결혼해서 9명의 자녀를 두었다. 부모가 이혼한 후에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, 성인이 된 한참 뒤에야 어머니와 가끔 만났다고 한다.)을 두었으나 1914년에 이혼했다.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무렵 한 군인과 재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, 이 아들은 만 1살 때 죽었고 두번째 남편과도 곧 이혼했다. 이후 미국, 중남미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차 대전 후에는 독일에서 지내고 1958년에 68세로 사망했다. 장남(둘째)인 드미트리는 누나가 결혼한 뒤 집을 떠나 다른 친척들과 지내다가 군에 들어갔다.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한 후에는 [[페르시아]] 국경으로 추방되었고, 페르시아에서 지내다가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다. 이후 이런 저런 활동을 하다가 2차 대전 중인 1942년 스위스에서 병으로 죽었다. 1926년에 미국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1937년 이혼했다고 한다.], 1908년에 집을 [[수녀원]]으로 바꾸고 스스로 수녀원장이 되었다. 1909년에는 가지고 있던 보석과 장신구 등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 병원이나 고아원 등을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.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세운 [[수녀원]]에서 입을 [[수도복]]도 디자인했는데, 사진을 보면 [[러시아 정교회]]의 수도복보다는 (아마도 엘리자베트에게 더 익숙했을) [[성공회]]나 [[가톨릭]]의 수도복과 유사했다. 그러나 지금 해당 수녀원 소속의 수녀들은 창설자가 디자인한 수도복이 아니라, 다른 러시아 정교회 수녀들의 복장에 가깝게 바꾼 수도복을 착용하는 듯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